2013년 6월 16일 일요일

맨오브스틸 철학

빨간 팬티 대신 인문학 입고 돌아온 슈퍼맨

지난 6월 13일 슈퍼맨이 트레이드 마크였던 빨간 팬티를 벗고 ‘맨 오브 스틸’이란 새로운 타이틀로 돌아왔다. 평소 고전적 취향을 갖고 있는 필자로서는 아쉬움을 금할 수 없지만, 어쨌든 슈퍼맨의 귀환은 반갑다. 게다가 ‘메멘토’, ‘인썸니아’, ‘다크나이트’ 시리즈 연출을 맡았던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이 제작 및 원안을 맡았다니 기대는 한층 더 높아진다.

그러나 단순히 재미만을 기대하고 ‘맨 오브 스틸’을 보러 간다면 고뇌하는 슈퍼맨을 보고 같이 고뇌할 수도 있다. 헐크의 괴력이 귀엽게 여겨질 만큼 힘이 넘치는 외계인들의 액션이 풍부한 볼거리를 제공하긴 하나, 영화가 결코 가볍지만은 않기 때문이다. 며칠 전 페이스북 지인이 담벼락에 슈퍼맨을 보면서 존재의 의미에 대해 생각했다길래 무슨 소리인가 했는데 영화를 보면 그 이유를 쉽게 알 수 있다. 슈퍼맨이 영화의 시종일관 내가 누구인지, 어디에서 왔는지, 무슨 목적을 위해서 살아야 하는지, 지극히 존재론적이고, 본질적이고, 종교적인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지며 고민하기 때문이다. 2시간30분에 가까운 상대적으로 긴 영화의 스토리도 그렇게 슈퍼맨이 스스로가 던진 질문의 답을 찾아가는 과정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그렇게 슈퍼맨의 성장 스토리를 목격하면서 각자 느낀 것은 다양하겠지만, 필자의 머릿속에 계속 멤돌았던 두 단어는 ‘플라톤’과 ‘공존’이다. 클락(슈퍼맨의 ‘지구인 이름’)이 어린 시절 동네 친구들에게 린치를 당할 때 품에 안고 있던 책이 플라톤의 ‘국가론’이다. 이걸 그냥 우연이라고 볼 수도 있겠지만 영화의 전체 흐름을 생각하면 우연이 아니다.

플라톤의 국가론은 사람이 사람답게 살게 만드는 정치 공동체는 어떤 공동체냐는 문제 의식을 제공하여 서양 정치 철학의 출발점이 되는 책이기도 하지만, 오스트리아 출신 영국 철학자인 칼 포퍼에 의해서 전체주의의 씨앗을 뿌린 책으로 비판받았던 책이기도 하다. 구체적으로 포퍼는 그의 역저인 ‘열린 사회와 그 적들’에서 플라톤이 ‘국가론’에서 개인이 자신의 이성으로 검증하지 않은 삶은 살 가치가 없다 주장한 소크라테스의 가르침을 배신하고, 그렇게 개방된 사회의 도덕적 타락에 대해 우려해 계층에 따른 사회적 역할 구분과 통제에 의한 질서 유지 논리를 강조한다고 지적한다.

클락이 떠나온 외계행성 크립톤의 모습이 바로 포퍼가 지적한 플라톤의 공동체의 문제점을 꼭 빼닮았다. 초기의 개방적 건국 정신에서 벗어나 개인의 자유 의지를 박탈하고 사회가 부여한 의무와 책임만 강조한 사회 크립톤은 사회 발전의 원동력을 잃어버린다. 그리고 전체주의적 성향이 대두될 때 그것을 견제할 수 있는 능력마저 상실한다. 자신이 믿는 것이 왜 믿는 것인지 의심해야 한다는 소크라테스의 비판 정신이 실종된 사회에 남은 건 자멸이었다.

나아가 포퍼가 소크라테스의 비판적 정신을 ‘거짓임이 입증될 수 있는 것만이 과학이다’라는 명제로 대체한 것처럼, 슈퍼맨 역시 크립온의 개방적 건국 정신을 지구란 새로운 행성에서 새롭게 입증하는 미션을 안게 된다. 그러나 마치 기독교의 예수처럼 33년간(성경에서 예수는 30년 동안 무명으로 살았고, 그 이후 3년간 제자를 키우고 사람을 돕고 그리고 십자가에 못 박혔다) 많은 인명을 구했음에도 여전히 차별과 경계속에 살다가 인류를 위해 희생하는 길을 택한 슈퍼맨은 과학자는 아니다. 그의 모성 크립톤은 인류가 흉내조차 내기 어려운 기계 문명을 달성한 행성이고 그의 아버지 조엘은 행성 최고의 과학자였지만, 자신은 그의 외계인 아버지가 뜻한 바처럼 기술을 깨닫기 전에 감정을 먼저 배웠다.

그가 희생을 택한 건 대를 위해 소를 희생하는 것이 쾌락은 최대한 늘리고 고통은 최대한 줄이는 공리주의적 진리이기 때문이 아니다. 자신을 믿어준 한 인간을 믿었고 그래서 인류를 믿었기 때문이다. 그건 계산이라기보단 자신이 건 희망에 대한 의지고, 선택이라기보단 그 희망에 대한 책임에 더 가깝다. 달리 말하면, 슈퍼맨은 시카고대학의 고전철학자 마사 누스바움 교수가 ‘공부를 넘어 교육으로’란 저서에서 강조한 공감 능력(empathy), 공동체 의식이 강한 인문학적 소양이 뛰어난 인물이다. 기술 문명의 끝에서 인간성의 회복을 꿈꿨던 외계인 아버지, 그걸 자신의 사랑으로 몸소 보여준 지구인 아버지의 유산을 모두 이어받은 것이다.

그렇게 밖으로는 강철 같은 육체를, 안으로는 인문학적 소양으로 무장한 슈퍼맨은 자기 희생을 감수해서라도 공존을 달성하기 위해 노력한다. 그의 라이벌인 조드 장군은 오직 제로섬 게임만이 가능하며 한쪽이 살기 위해서는 다른 한쪽이 죽어야 한다고 주장하지만, 슈퍼맨은 그 논리를 수용하지 않는다. 그의 비판적 정신은, 창조력은 둘이 모두 사는 길이 가능하다고 반박한다. 그리고 이를 입증하기 위해 그는 싸운다. 그 과정에서 그는 성장하고 강해진다. 그래서 앞서 썼던 것처럼 슈퍼맨의 액션은 단순한 액션이 아니다. 그건 그의 내적 성숙이 외적 성장으로 보여지는 과정이다.

물론 현실에서 그와 같이 사회적 관계가 다 이익으로만 환산되지 않는다는 걸 보여주지 않기 위해 싸우는 우리들은 슈퍼맨이 아니다. 조드 장군과 싸우지는 않지만 우리는 각자의 지옥 속에 산다. 예컨대 대한민국에 갑이 얼마나 될 것인가. 대부분의 을들이 얼마나 많은 서러움을 감내하며 가정을 위해 살고 있는가. 더구나 슈퍼갑인 슈퍼맨도 쓰러지고 아프기도 하는데, 그보다 못한 을들은 어떻겠는가.

본질적으로 슈퍼맨은 픽션이다. 내가 위기에 빠진다고 갑자기 어디선가 나타나 나를 구해줄 빨간 망토 아저씨는 없다. 노루가 사냥꾼의 손에서 벗어나고 새가 그물치는 자의 손에서 벗어나듯 스스로를 구해야 하는 것이 우리 운명이다. 그럼 이 현실속에서 어떻게 우리는 싸워나갈 수 있는가? 어떻게 스스로가 왜 사는지, 그리고 이 사회가 어떻게 하면 더 좋은 곳이 될 수 있을 지를 증명할 수 있는가?

영화 속 슈퍼맨도 사실 고뇌하는 불완전한 인간이란 건, 나아가 현실속에 결코 완전한 사회도 완전한 인간도 없다는 건 절망의 근거는 아니다. 불완전하다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걸 뜻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얼마 전 작고한 경제학자 알버트 허쉬만이 일생동안 강조했던 것처럼 그 불완전 속에 가능성이 있다. 결코 유토피아는 만들 수 없겠고 그런 시도가 히틀러나 조드의 경우처럼 더 심한 악을 정당화시킬 수도 있겠지만, 작은 변화는 가능하다. 개인의 자유와 개성의 존중 하에서 여럿이 의견과 힘을 모았을 때 사회적 변화는 가능하다. 요즘 유행하는 말로 창조와 혁신이 가능하다. 혁명은 불가능할지 모르나 개혁의 가능성은 가장 절망적으로 보이는 순간에도 언제나 열려있다.

돌아온 슈퍼맨은 빨간 팬티를 벗었지만 인문학을 입었다. 그는 공존을 꿈꾸고 가능성에 도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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