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에 얘기했던 것처럼 이제는 내 어머니에 대해서 이야기 할 차례다.
어머니의 자식 교육 방식은 귀담아들을만 하다. 그 방식에 찬성하지 않는 사람일지라도 얻을 것이 있을 것이다.
고등학교 때 난 공부하라는 잔소리를 들을 일이 없었다. 왜냐하면 내가 이모댁에서 고등학교를 다녔기 때문이다.
큰 이모는 내가 불편해할까봐 공부에 대해서 얘기를 꺼내시는 법이 없었다.
어머니 역시 옆에서 돌봐주지 못하는 미안함 때문인지 잔소리를 거의 안하셨다.
난 매우 자유로운 생활을 했다.
더구나 고3 때에는 학교 앞에 방을 얻어 따로 살았다.
이모가 매일 아침 오셔서 밥을 주시긴 했지만, 그 이후에는 아무도 나에게 간섭할 사람이 없었다.
새벽까지 만화방에서 놀기도 하고, 당구장에도 기웃거렸다.
나름대로의 자유를 즐기면서도 나만의 룰은 있었다. 성적이었다.
난 의지력이 그렇게 강하지 못하다. 하지만 성적에 대해서는 예외였다.
그렇게 놀다가도 시험 기간에는 매일 밤을 새서라도 성적을 끌어올렸다.
고3 6월부터는 흔히 말하는 4당5락을 실천했다.
정말 집에서 4시간 밖에 자지 않았고, 학교에서 조차 한숨도 자는 법이 없었다.
내가 내 미래에 대해 거창한 목표가 있어서 그랬던 것은 아니다.
그냥 부모님을... 특히 어머니를 실망하게 만들 수 없었던 것 뿐이다.
어머니는 자식에 대한 교육열이 정말 대단하셨다.
흔한 스토리지만 어려운 가정 형편으로 인해서 중학교 밖에 나오지 못하셨다.
그래서 학력에 대한 컴플렉스가 있었고, 그걸 나를 통해 풀고자 하셨다.
어렸을 적 우리 집은 감, 포도 등 과수와 돼지, 소 등 가축과 벼 농사를 동시에 했다.
두분이 하시기에는 농사일이 너무 과중했다.
아버지는 내가 태어나기 전까지는 농사를 지어본 적도 없으셨다.
게다가 집에 고장난 백열등 조차도 갈아끼우지 않으시는 가부장적인 분이시다.
그러다 보니 어머니의 노동 부담은 보통사람이 상상하기 힘든 수준이었다.
과중한 노동으로 어머니의 몸은 항상 편찮으셨다.
어머니는 허리 디스크가 있으셨는데 항상 허리에 철심이 든 복대를 차고 일을 하셨다.
나는 그런 어머니가 정말 불쌍했다.
어머니는 자신이 농사일로 바빠서 자식을 제대로 공부시키지 못할까봐 두려워햇다.
최소한 그런 시골에서 애를 키워서는 안되겠다는 생각하신 듯 하다.
그래서 난 6살 때부터 마산의 할아버지집에 맡겨졌다.
거기서 유치원을 다녔다.
7살이 되어서는 김해 시내의 작은 이모댁으로 갔다.
거기서 초등학교 1년을 보냈다.
그러다가 이모댁이 우리 집 근처로 이사와서 농사를 짓기 시작하면서
결국 나도 초등학교 2학년부터는 우리 집에서 다니게 되었다.
우리 집은 김해시 진영읍에 있다.
노무현 대통령의 고향이다.
내가 다닌 초등학교는 노무현 대통령이 다닌 초등학교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있었다.
그 학교에는 초등학교 2학년이 되어서도 글을 잘 못쓰는 아이들이 꽤 있었다.
전반적으로 교육 수준이 떨어졌다.
나는 보통의 아이들에 비해 월등하게 성적이 좋았다.
공부를 별로 할 필요가 없을 정도였다.
그렇게 2년이 지나자 어머니는 이렇게 놔두어서는 안되겠다는 생각을 하셨다.
그래서 흔히 말하는 위장전입을 감행했다.
마산시에 아파트 전세를 얻어 주소를 옮긴다음 마산의 초등학교로 전학을 시켰다.
내가 4학년, 여동생이 2학년 때부터 그렇게 마산에서 학교를 다녔다.
어머니는 진영에서 농사를 지으시면서 밤에는 마산의 아파트로 와서 밥을 짓고 청소를 하셨다.
그렇게 해서 나는 중학교를 마산으로 진학하게 되었다.
그러면서 원래 진영 농장으로 다시 거처를 옮겼다.
집에서 가족이 같이 있을 수 있어서 좋았지만 통학이 문제였다.
어머니는 그때부터 매일같이 우리를 마산의 학교로 태워다 주셨다.
그리고 마칠때는 학교 앞으로 데리러 오셨다.
나는 친구들이랑 놀고 싶었지만 빠져나갈 구멍이 없었다.
그렇게 나는 모범생이 될 수 밖에 없었다.
고등학교에 진학할 무렵이 되자 어머지는 또다시 조바심을 내셨다.
당시 마산시내의 고등학교는 성적이 우수했으나, 창원의 고등학교는 성적이 나빴다.
흔히 마산 연합이라고 해서 연합고사 성적이 좋은 학생들이 마산의 고등학교에 지원하고
떨어지는 학생들은 후기로 창원의 고등학교에 갔다.
그런데 내가 졸업할 무렵부터 창원의 고등학교들이 마산 연합에 하나 둘씩 편입되기 시작했다.
어머니는 내가 창원의 고등학교로 배정받을까 걱정하셨다.
그래서 어머니는 결국 나를 울산의 큰 이모댁으로 보냈다.
당시 울산은 비평준 지역이었고, 경남 내에서는 누구나 지원이 가능했다.
그렇게 나는 울산 학성고등학교에 들어가서 "마산"이라는 별명으로 불리면서 고등학교 생활을 했던 것이다.
누구나 그렇겠지만 나는 특히 어머니의 헌신에 대한 부채의식이 심했다.
어머니는 그 부채를 좋은 대학에 가는 걸로 갚으라고 했다.
그냥 해서 안 먹히면 눈물로 호소했고, 말 뿐만이 아니라 모든 행동으로 자신의 의지를 보였다.
그렇게 성적은 나에게 절대 물러설 수 없는 마지노선 같은 것이 되어버렸다.
솔직히 부모가 자식에게 이정도로 심한 감정적인 부담을 주는 것은 아이에게 가혹한 것이다.
나는 어릴 때 부모님에게 내가 하고 싶은 것이나 가지고 싶은 것을 요구한 적이 없다.
나는 그걸 죄악이라고 여겼다.
동생에게 화를 내지도 않았다.
좋은 오빠가 되는 것이 부모의 헌신에 보답하는 길이라 여겼기 때문이다.
크면서 반발심도 생겼다.
어머니는 나를 야단칠 일이 있으면,
"내가 이렇게 힘들어도 매일같이 너를 태워다 주고 태워오고 하는데 니가 어찌 그럴 수 있느냐!"
라고 꾸짖었다.
나는 그런 소리가 정말 듣기 싫었다.
'나도 그런거 원치 않아... 엄마가 매일 그러는 통에 친구들이랑 놀지도 못한다고..'
하고 소리치고 싶었다.
그래도 결국 그런 말을 입 밖에 꺼내지는 못햇다.
사춘기의 반항심보다 미안한 마음이 더 컸기 때문일 것이다.
가혹한 방법이지만 어째뜬 어머니는 소기의 목적을 달성했다.
그리고 나도 그 결과에 만족한다.
학창시절의 스트레쓰는 대학교 때의 방탕한 생활로 날려버린지 오래다.
몇 년의 허송세월 이후 정신을 차렸을 때
나를 정상적인 삶으로 돌아가게 만들어 준 무기는 학벌이었다.
그 전에는 속물적이라 비난했지만 결국 내가 믿을 것 그것 밖에 없었던 것이다.
어머니는 아들과 딸을 대학에 보내고 난 뒤
늦은 나이에 검정고시를 보셨다.
그리고 전문대에 입학을 하셨고
매우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을 하시며 졸업식 때 대표로 상을 받으셨다.
결국 나는 어머니의 방식에 대한 조그만 반발심마저도 지워버리지 않을 수 없었다.
어머니는 옳았고, 정말 현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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